2012. 8. 11. 23:20ㆍ4. 끄저기/끄저기
1. 빌어먹을 독서 패턴.
항상 내 자신이 어렸을 적, 책을 읽어왔던 경험들을 되새겨볼때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여기 이른바, 고전이나 명저라고 불리는 작품이 있다고 하자.
이런 작품들은 그 명성으로 인해 제 2, 제 3 의 텍스트나 다른 장르의 작품으로 가공되거나 변형된다.
그런데 이러한 변형 중, 특히 그 내용이 어린이들에게 보다 쉽게 읽히도록 가공이 되었을 경우
그리고 바로 그렇게 변형된 텍스트를 어떤 어린이가 접했을 경우...
불행하게도 그 어떤 어린이 중 하나가 나였고,
이 빌어먹을 독서 패턴에 의해 나는 고전의 참 맛을 느끼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읽을 거리들이 있고, 이에 반해 한 사람의 수명은 너무나 짧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작품 하나하나를 선택할 때, 이미 줄거리를 아는 내용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전체 줄거리보다는 묘사 하나하나에 충분히 감응할 수 있다면 줄거리를 미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 작품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나 명저라는 작품은 대부분 이런 경우에 속하므로 더더욱 다시 따져 읽어보아야 할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묘사 하나하나에 감응하는 감수성을 갖춘다는 것도 사실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가급적 명저나, 고전들은 함부로 제 2, 제 3 의 텍스트를 접할게 아니라
대략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 기간에 제 1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돌릴수만 있다면 나 역시 그런 독서 패턴을 갖추고 싶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버렸고, 이제라도 이런 작품 하나하나를 되새겨볼 수 있는 것 역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고전이나 명저의 제1텍스트를 접한다는 것은 가슴뿌듯한 경험임에는 틀림 없는 일이다.
2. 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그런 측면에서 나의 뇌리에 박혀 들어오는 문구는
바로 여러 번 반복되는 '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이라는 문구이다.
이 문구는 인간의 삶이 '결핍'이라는 원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물리계가 자연상태에서 밀도의 불균형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 불균형이 균질을 향한 움직임을 촉발시키듯이
결핍은 인간에게 욕구를 추동시키는 원인이 된다.
결핍은 삶이 가지는 본성중 하나이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그 '결핍'에 승리할 수 없다.
다만 그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 '결핍'을 우회하거나 관통하여 '결핍'이 가로막고 있는 너머의 목표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60억의 인구는 60억개의 결핍을 지고 산다.
즉 인간은 저마다 자신만이 지고가야 하는 '결핍'이 있는 것이다.
그 '결핍'너머로 얼마만큼 접근해 보느냐, '결핍'을 얼마나 관통해보았는가가 결국 인간 하나하나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냐를 결정짓는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처음 이 문구를 읽었을 때 이 문구가 내 심장을 찌르고 내 인생의 시작점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게도 늘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어떤 순간에 나는 성공이라는 경험을 했고, 반대로 어떤 순간에는 실패라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공통된 점이 하나 있다면 매 순간마다 내가 가용가능했던 자원중 어떤 것들은 결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예를 들어서 '시간'과 같은 요소일 때도 있었고
내가 충분히 더 노력했다면 가능했던, 예를 들어서 '나의 노력'과 같은 요소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자책을 한적도, 반성을 한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선천적으로 취득하지 못한 조건에 대해 비관한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내가 살아가는 삶이 가진 본질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3. 허무주의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결핍'이 삶의 본질 중 하나이고, 나 역시 나의 '결핍'을 지고가야 한다면
결국 나는 이 '결핍'을 이겨낼 수 없고, 다만 인생의 종료와 함께 링에서 떠나는게 전부인게 된다.
되돌아본 삶에서 내가 무언가 부족했던 것이 삶의 본질적 측면 중 하나라면
앞으로의 삶에서 역시 내가 어떤 노력을 하든간에 뭔가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결국 내 앞에 남는 것은 '허무주의'이상,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대단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던 부분 중 하나였다.
노인은 '소년'의 결핍을 딛고, 거대한 물고기를 잡는데 성공했지만, 그 물고기의 살점은 상어떼의 공격에 의해 완전히 없어지고 만다.
상어떼는 삶에서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아마 개개인의 운명일수도 있고, 좀더 적나라하게 '팔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저항은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없고
저항의 결과로 남겨진 꼬리뼈가, 저항하지 않은 결과로 남겨진 꼬리뼈보다 아름답다라고 누구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노인은 무엇을 한 것일까? 큰 물고기를 낚았다는 경험?, 소년이 말한대로 큰 물고기에게는 지지 않았다는 경험?
과연 나는 어떻게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내게도 성공했던 적이 있다는 긍정적인 경험?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요소로 인해 기복은 있었을지 몰라도 '그때 그건 정말 잘했지'라는 그런 경험에 대한 기억이 내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인 걸까?
마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이 부분은 내겐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해설서나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불굴의 인간상이라는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무엇이든지 교훈으로 귀결하기를 좋아하는 고매한 척하는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속는듯한 느낌이 들고,
운명지어진 운명의 굴레라는 생각으로 남겨놓으려니 허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4. 내게 소년은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을 통해 결국 내가 자문하고 싶은 것은
"내게 과연 노인을 산티아고 할아버지라고 불러주던 그와 같은 소년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소년은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비록 노인은 4일동안 바다에서 혼자 고독한 사투를 계속했고, 이것은 노인 이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경험이 됐지만,
노인에게는 그러한 과정을 공감하고 승리했다고 말해주는 소년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노인은 그로인해 승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삶에서 승리란, 실제 맞닥드린 사건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승리라고 평가해 줄 때 취득되는 것이다.
바로 그 평가에 따라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결과도 전혀 다른 결과로 분별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 작품에 노벨문학상 수여를 결정한 스웨덴 한림원에서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실세계에서 의로운 투쟁을 전개한 모든 사람에게 의당한 존경심"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노벨상을 수여한다고 밝힌것은
그와 같은 측면이 아니었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승리의 스토리를 써내려가지만 상당부분은 개인의 스토리로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아마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간 스토리중 어떤 것들은 재평가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한 스토리일 것이다.
이 책 '노인과 바다'는 그리고 이 작품에 수여된 노벨상은 그렇게 사그라져간 수많은 스토리에 함께 수여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 역시 내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독특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 지금까지의 궤적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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