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대호 - 끓는 주전자 뚜껑.

2012. 8. 12. 02:144. 끄저기/끄저기

관람일시 : 2012년 8월 4일 16시
관람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10여년전 대학에서 이런 저런 문학 비평 수업을 들을때 했던 생각이다.
비평가들은 하이에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아무리 훌륭한 비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동네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 그림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이 아무리 조잡하더라도 창작과 창작이 아닌것과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비평 수업을 듣다보니 비평 역시 또 하나의 창작이고 그래서 이른바 '비평문학'이라는 개념도 접했다.
나의 반응은 가벼운 퍽큐이다.
그래봐야 비평가 집단이 하이에나 집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쓰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서평이니, 관람평이니...
결국 내가 쓰는 글 역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창작이라는 거대한 작품 앞에 그저 내 기억이나 정리해보자고 쓰는 글자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을 먼저 분명히 하고싶다.

 

1. 루저의 공감요소
   단언컨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붕괴됐다.
   공동체 의식이 붕괴된 사회는 루저를 양산하는 공장이 된다.
  
   사람들의 '공감'을 끄집어내는 것이 돈이 된다면 '루저'모티브는 앞으로 상당기간 이 사회에서 중요한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루저'모티브가 상업적으로 계속 소비되는 한, 붕괴된 공동체 의식은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루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그 예술작품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낼 여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루저'모티브가 더 이상 상업적으로 먹히지도 않는다면... 기대하시라~ 그 때가 혁명의 순간이다.
  
2. 정체불명의 루저.
   그런데 '루저'모티브가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바로 '루저'는 '루저'이되, '정체불명의 루저'일때, 즉, 공감요소가 명료하지 않은 '루저'일 때이다.
   이 연극에서 등장시킨 슬픈 대호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두명의 루저는 '찌질한 루저' 컨셉이다.
   방점이 뒤가 아닌 앞에 있을 정도로 정말 '찌질하기 그지 없는 루저'이다.

 

   한편으로 작품의 전반에서는 사회고발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이런저런 장면에서 연출가가 이를 의도했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드러난다.
   '찌질한 루저'와 '사회고발'의 연결지점이 어색하다는 점.
   개인적으로 이 연결지점이 엉성하고, 여기에 리얼리즘의 딱풀 찌꺼기가 엉성하게 뭉개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이 '찌질하기 그지 없는 루저'라면,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낸 '찌질한 인생역정'에서 그들이 여전히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 이러한 상황은 특정 정치세력이나 특정 정치인보다는 전반적으로 관용과 역지사지가 부족한 사회의 탓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고발의 강도는 오히려 풍자로 전환되는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사회고발이라는 톤을 유지하는게 목적이라면 루저는 분명히 다른 유형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찰 특공대에게 복날 개처럼 얻어터지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나,
   고작 재산권 조금 외쳤다고 불에 타죽어야 했던 용산 남일당의 철거민들처럼...

 
   21세기 초반 일그러진 대한민국이 양산하는 루저는 바로 그런 유형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개패듯 맞아야 하고, 어느날 갑자기 타죽을수밖에 없는 길로 내몰리는,
   중산층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사는 일반 시민들, 법을 충분히 알고 지킨다고 생각하는 교양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머리에 붉은띠를 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도치 않게 몰렸을 때,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보니 폭도로 몰려 버린 그런 사람들,
  
   만약에 루저의 유형을 이렇게 가져갔다면 작품이 그렇게 의도하고 싶었던 사회고발과 궁합이 잘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3. 과유불급  
   하나의 작품이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설정이 필요하다.
   그 설정은 단순할수록, 강렬할수록 좋다.
   이것은 전체 진행의 스토리라인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무대장치라는 시각설정 따위가 그 중요성에 비교될 바가 아니다.
  
   그런데 그 설정 하나하나는 단순강렬할데, 모아놓고보니 심각한 불엽화음이 발생하고 말았다.
   유력정치인의 테러라는 설정, 너무나도 찌질한 루저 주인공들,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는 보도들, 사채업자...
   그러다가 카운터 펀치, 순희의 등장,
  
   너무나 극단적인 설정들, 극단적으로 선택된 대사들, 극단적인 연출장치들
   이러한 요소들은 지나친 리얼리즘 컬플렉스 아니면, 감정(공감, 감동) 강요장치 아니면 주제 강요장치 이상, 이하도 아니게 보인다.
   한마디로 불친절하고 건방지게까지 느껴졌다.
  
   이러한 장치마저 '거지같은 세상에 대한 통렬한 복수의 표현'이라고 강변한다면 나 역시 내 느낌을 이렇게 바꿔말할 수 있겠다.
   '촌스럽다.'
   
강대호 역할을 했던 문천식씨는 이전 개그맨으로 한참 날릴때의 이미지가 남아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차분하고, 진중하게 캐릭터를 소화한 배우라고 느껴졌다.
그나마 끓는 주전자 뚜껑같았던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를 잡아주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소극장은 배우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그리고 그 에너지를 관객이 소화하는데

충분한 고려를 기울인 훌륭한 극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