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일식 여행 14 - 약속의 땅, 엑스머스(Exmouth)

2023. 9. 27. 01:491. 별과 하늘의 이야기/2023 서호주 일식 여행기

날이 밝을 때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잘 잤다.
아침이 되자, 어제는 어두워서 잘 볼 수 없었던 Big4 Plantation Caravan Park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둥이 옆에 제법 멋진 나무가 서 있었다.


이곳은 독특한 규칙이 있었다. 
하수구가 따로 없고 허드렛물은 그냥 잔디밭이나 나무에 버리라고 되어 있었다. 
캠핑카에 물을 채울 수 없다는 규정도 있었다. 

 

플렌테이션 카라반 파크 배치도


그러고보면 서호주에서 만난 오토캠핑장은 저마다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캠핑장에 머무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었다. 
물론 화장실과 샤워실이 잘 갖춰져 있다는 공통점은 한결 같았다.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엑스머스까지의 거리가 36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한편 어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신 정의완 선생님 가족은 아침부터 서두르셨다.
정 선생님은 엑스머스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미리 가서 자리를 잡을 생각이라고 하셨다. 

정 선생님 가족은 이미 호주를 여러번 여행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호주 상황에 익숙하셨고 그래서 숙소가 없어도 충분히 대응이 된다는 걸 잘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역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나처럼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으로는 따라잡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식사를 느긋하게 한 후 1마일 제티(One Mile Jetty)라는 곳을 구경하러 갔다. 
가스코이네 강 입구에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약 1.5킬로미터 길이의 열차 궤도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이곳은 패쇄된 상태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안전문제로 이미 2017년부터 패쇄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패쇄된 1마일 제티 열차궤도


담장 구멍으로 바다를 향해 쭉 뻗은 궤도 사진을 찍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담장구멍으로 보이는 1마일 제티 풍경.

그냥 걷기만이라도 해 줬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컸다. 

 

바로 앞에는 기부금 박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칠판이 하나 있었는데

한 사람이 5달러씩, 100만 명에 도달해서 500만 달러가 되면 제티를 다시 살릴 수 있고
더불어 카나본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글에서  처절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45억이라니...
너무 큰 돈 아닌가? 
이 돈을 세금이 아니라, 정말 여행객들의 기부금으로 모으겠다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되기를 바란다.

바로 인근에는 카페와 철도 박물관이 있었다. 
하지만 카페는 문을 여는 것 같지 않았고 

허름한 기차 관련 전시품들이 빈티지한 멋을 안타깝게 뿜어내고 있었다. 

 

 


시간은 오전 9시 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엑스머스를 향해 출발할 때가 되었다.

서호주에 온 이유가 엑스머스에 가기 위해,
2023년 4월 20일, 엑스머스에서 발생하는 포스트 팬데믹 첫 개기일식을 맞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선 주유를 해야 했다. 
주유소를 찾아나섰다. 

그런데 카나본 외곽이 점점 다가오는데 주유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은근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에 주유소가 보였다. 
주유소에 들어가기 위해 진행하는데 갑자기 앞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가 들렸다. 

헉...
순간 내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핸들을 틀어 주유소로 들어갔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이 아직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있어 다행이지 정말 큰 일 날뻔했다.

 

트럭이 지나가며 성난 아저씨가 욕을 한 바탕하고 지나갔다. 
욕들어먹을 짓을 했지...

그러고보니 잠깐 정신을 딴데 판 사이에 나도 모르게 대한민국 도로 방향으로 진행했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침에 출발할 때면 언제나 외우던 말
"중앙선은 오른쪽, 중앙선은 오른쪽!"을 되뇌었다. 

 

기름을 채우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주인 아저씨가 피식 웃으며 계산을 했다.

 

중앙선은 오른쪽! 중앙선은 오른쪽! 

나만큼이나 놀랐을 안쥔마님이 액땜 한거라며 진정시켜줬다. 


엑스머스로 가는 길은 아주 한산했다. 
땅덩이가 넓어서 왠만큼 사람이 모여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닐야 브리지에서 경찰이 차를 세웠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했더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왔다.

우리도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답례했다.

 

음주운전 단속 중이란다. 

시간은 오전 11시 경이었다. 

대낮에 음주운전 단속이라니. 

하긴 여기 경찰도 조기 퇴근해야 할테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 아저씨의 설명대로 음주 측정기를 불었다.

아저씨가 음주 측정기에 부착했던 빨대를

호주 음주운전 단속 기념품으로 챙기라며 주었다. 

 

유쾌했다. 

 

1번 도로를 벗어나 엑스머스로 향하는 354번 국도로 접어들었을 때는
완전 시골길답게 노견이 거의 없는 폭좁은 도로가 이어졌다. 


 

열심히 올라가는데 저 멀리 낯선 구조물이 보였다.

 


놀랍게도 개미집이었다. 
개미집이 한 번 보이기 시작하더니 들판 여기 저기 무수히 개미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리왕국을 지나 개미왕국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바로 옆에 큰 개미집이 서 있는 휴게 공간이 보였다.
사진을 찍을 생각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내렸다.

차 문을 열자 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개미왕국에 들어섰을지언정 파리 왕국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구태여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긴 했지만 이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어디를 가나 항상 개미집 천지였다. 

그 유명한 코랄베이 로드가 분기되는 지점에 할머니 한 분이 양봉모자를 뒤집어 쓰고 차를 세웠다.


할머니께서 지금 코랄베이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해 주셨다.
지나가는 차들이 혹시라도 코랄베이에 들어가지 않도록 가이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그래도 한국에서 숙소를 예약하던 시점부터 코랄베이는 이미 만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계속 엑스머스를 향해 달렸다.


엑스머스가 가까와지자 노견이 생겼다. 


2023년 4월 19일 13시 44분.
드디어 엑스머스에 도착했다.

엑스머스 입구에는 간이 야영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이미 수많은 텐트와 캠핑카가 꽉 들어차 있었다.

 

 

 


엑스머스 운동장 한 켠에는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일 이곳에서 일식도 보고 공연도 하겠구나 싶었다. 

 

우리의 목적지 엑스머스 골프클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엑스머스 골프클럽 주차장에 잘 도착했다.

골프클럽에서 일하시는 아저씨가 나와 우리를 맞았다.

이름을 확인한 후 화장실과 샤워실을 안내해 주셨고, 
전기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디바이스 충전은 건물 여기저기에 있는 콘센트를 이용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골프클럽 주차장에 나무 그늘이 잘 드는 곳은 이미 먼저 온 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카라반 옆에 너무 가깝지 않도록 호둥이를 주차했다. 

바다가 가까이 보였다. 
여기 오기를 잘 한 것 같다.

 


탁자와 의자를 설치하고 어닝을 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어닝을 지탱해야 할 고정나사 하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정나사는 두 개가 필요했다. 

다행히 반대쪽에는 고정나사가 걸려 있었지만 그 고정나사도 다소 헐겁게 물려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어닝을 접을 때 단단하게 결속하지 못한게 분명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어닝을 접었던 곳이 어디더라?
마지막으로 어닝을 접었던 곳은 레지포인트였다. 
레지포인트에서 어닝을 접을 때 고정 나사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무려 1,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레지포인트에서 말이다. 

햇살이 너무 뜨거운데다가 나무 그늘을 받지 못하는 상태라서 어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골프클럽 사무실로 가서 아저씨에게 
고정나사를 보여주며 이것과 똑같거나, 하다못해 모양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규격의 나사를 구할 수 없는지 물었다.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다가
시내에 캠핑용품을 파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물어보면 어떻겠냐고 얘기해 주셨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저씨에게 캠핑용품 가게가 어디있는지 설명은 들은 후 호둥이를 몰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다행히 캠핑용품 가게는 그리 멀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가 고정나사를 보여주며 동일한 나사가 있는지 물었다. 
아주머니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You are lucky guy. we have that last one!"


동일한 고정나사를 보니 너무 반가왔다.

뭐 그리고 럭키 가이인줄은 알겠지만, 왜 일케 비싼거야...
조그만 고정 나사 하나가 28,000원이라니!

어쩌겠는가...그늘은 필수인 것을.
어쨌든 구했으니 됐다.
마음이 편해졌다.

시내에 나온 김에 시내 구경을 다녔다.
100% 관광으로 먹고사는 것 같은 작은 마을 엑스머스가 온통 일식 특수에 북적이고 있었다.

 

줄줄이 세워진 간판들

 

 

그럼! 준비됐고말고!

 

유일하게 하나 뿐인 것 같은 바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곳곳에 모여있는 사람들


포스트 펜데믹의 첫 번째 개기일식인 이번 일식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그 드넓은 호주 대륙을 놔두고 서호주 북서쪽에 돌출된 작은 반도 엑스머스만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작은 지역에 그 동안 개기일식에 굶주렸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연히 숙소나 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 그대로 낭만이라면 낭만이었다.
당장 나도 그 덕에 호주 일주 여행을 할지언정 들르기 쉽지 않은 엑스머스에 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비둘기처럼 엑스머스에는 흰 앵무새들이 있었다. 
너무너무 예뻤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쓰레기를 주워먹는 건 우리나라 닭둘기와 동일했다. 
어쨌든 예쁘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이런저런 상점을 돌아다니며 아이쇼핑도 하고 
기념품 샵에서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귀국선물로 딱 적당해 보이는 텀블러도 샀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엑스머스 골프클럽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어닝을 폈다.

빨래줄을 걸어 뜨거운 햇살에 이불 홑청도 말렸다. 

 



안쥔마님과 함께 엑스머스 바다 구경에 나섰다. 

 

엑스머스 해안 풍경

 

풍광이 독특했다.

 

쾌청한 날씨 덕에 물빛과 하늘빛이 모두 아름다왔다.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하늘과 바다, 사람.  모든 게 예술이다. 

 


엑스머스 골프클럽 주차장도 어느덧 캠핑카들로 가득 찼다. 

우리 바로 옆에 카라반을 정박해 두었던 차도 돌아왔다.
노부부께서 강아지 한 마리와 오셨다. 

인사를 나눴다. 
여장부다운 기운을 뿜뿜 풍기는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아주 멋진 나라에서 왔다며 사우스 코리아 아주 좋아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리셨다.

"그런데 내일 일식은 어디서 볼 거냐?"

"글쎄요.  시내로 가야할지 고민이에요."
 
"그냥 여기 바닷가에서 보지 그러냐?"

"그런데 사람들 많은데서 같이 봐야 더 재미있던데요?"

"내일 여기 바닷가에 사람들 몰려올거야."

"정말요?"

아주머니 덕에 일식을 구경할 곳도 정했다. 
아침 일찍 바닷가에 나가 자리를 잡아야겠다.
바로 옆이지 않은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 대장부같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사진에 우연히 담겼다. 반면 아저씨는 힘알이 하나 없어보이시더라는.

이제 내일 일식만 마음 편하게 기다리면 된다. 
샤워를 하러 가면서 빨래를 한아름 가져가 손빨래를 했다.

빨래줄에 빨래를 너니 전문 캠퍼 느낌이 났다. 

 

어느덧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촛불을 켜고 가지고 온 헤드렌턴을 총 동원하여 저녁 식사를 했다. 

 


서호주는 어디나 노을이 아름다웠다.
엑스머스의 노을도 그 어느곳 못지 않게 아름다왔다.

이윽고 밤이 되고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곳에 온 팀 중에 독특한 팀이 있었다. 

똑같은 색깔의 카니발 두 대에 중년 남녀가 가득 타고 온 것이다. 
밤에 보니 이곳저곳에 천체망원경을 펴 놓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봤다.

홍콩에서 왔다고 한다. 
모두 학교 선생님이시란다. 

잠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안쪽에 어떤 캠퍼분이 모닥불을 크게 피웠다. 

와! 불멍이다. 

그러고보니 모닥불 위로 피어오르는 은하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로 돌아가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나왔다. 

그런데 그 사이 변수가 생겼다. 

엑스머스 시내 쪽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서치 라이트가 하늘을 긁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하...홍콩 선생님들 어쩔...

 

요란하게 하늘을 긁어대는 서치 라이트.


일식 보시러 온 분들은 대개 다 아마추어 천문인들일텐데...
이 도시의 행사 기획자 분들은 아마추어 천문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보네...


어쨌든 음악은 신난다.

그러면 됐지 뭐.

밤이 깊어가고 그 시끄럽던 음악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웅장한 미리내가 하늘을 장악하며 떠올랐다. 

 

이제 내일 저 하늘에서 달과 태양의 앙상블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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