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일식 여행 15 - 빛의 향연

2023. 9. 28. 00:111. 별과 하늘의 이야기/2023 서호주 일식 여행기

2023년 4월 20일 아침 6시 30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엑스머스 하늘에 해가 떠올랐다.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태양빛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이미 바닷가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엑스머스 골프클럽 주차장 정문은 바닷가로 이어진 길목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바다로 나가는 차들이 종종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도 나가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 싶었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겨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안쥔마님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가져다 주기로 했다.
해변이 가까우니 여러가지로 참 편했다.


해변으로 들어오는 길목 양쪽에 큰 모래 둔덕이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가 드넓게 내려다보였다.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문제는 바람이 너무나 강하게 분다는 것이었다.

강한 바람이 해변에서부터 모래를 쓸어올라왔다. 
얼굴이 따끔거려 바다를 바라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둔덕 너머 잡풀 뒤에 앉아 바람을 피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안쥔마님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왔다.
날아드는 모래알을 피하기 위해 바닷가 바로 앞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어떤 사람이 카이트 서핑을 하고 있었다.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다. 

 

바다와 태양,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수평선에 유유히 떠 있는 유람선을 보면서 가슴속에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약속된 장소에 제가 왔습니다.
해님보다도 
달님보다도 
제가 더 먼저 나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당신들보다 훨씬 작으니까요.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2019년 7월 2일. 
나는 칠레 라실라 천문대에 있었다. 
그곳에서 내 생애 첫 개기일식을 만났다. 

 

그때 나는 직장인이었다. 
그 이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경남 산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곧이어 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세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갔고
난 삶의 파도에 맞아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괜찮다. 

난 쓰러지지 않았고 
머슴으로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삶의 진수에 몸을 적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쉽지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삶은 하루하루 기적처럼 나를 보듬어 주었다. 

 

그것이

포스트 팬데믹의 첫 개기일식이 일어난 
서호주 엑스머스에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된 내가 말이다. 

이런 순간이 내게 허락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저는 얼마든지 작아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은 물론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작아질 수 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와서
제가 아무리 작아져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저 지금처럼
하늘만 바라보면 
행복한 사람으로
남게 해 주세요.

 

 

태양이 고도를 높이고 그 사이 바람도 약해졌다. 

자리를 잡은 모래 둔덕으로 다시 올라갔다. 
의자를 펴고 편하게 자리를 잡아 
개기일식을 기다리는 엑스머스 해변을 여유있게 내려다보았다. 

 

 

해변으로 끊임없이 차와 사람이 몰려들었다. 

 


어느덧 엑스머스 해변이 차들로 가득찼다. 

 



4년 전 유럽남부천문대(ESO)에서 준 개기일식 관측용 안경. 이번에도 아주 유용하게 썼다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확연히 어두워진 엑스머스 해변

 

사방이 어두워지고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달이 태양을 막아서고

 

 

달그림자가 장엄하게 세상을 뒤덮었다. 

 

 

 

 

 

 

개기일식 전과정


일식이 끝나고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자리에 앉아 천천히 바닷가를 빠져나가는 사람과 차들을 구경했다. 

 

골프클럽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홍콩 선생님들께서 착착 짐을 챙기고 있었다.

곧이어 들어오던 그 모습 그대로 일사분란하게 빠져나갔다. 

마치 군인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대한민국에 있을 때 잡은 원래 일정은 
개기일식이 끝난 후 바로 온슬로우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온슬로우 숙소까지 400킬로미터, 
그리고 그 다음날 포트 헤드랜드까지 540킬로미터의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마음 속에 남은 여운을 서둘러 짐을 정리하는 것으로 삭여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서호주에 온 최대 목적을 이루고 보니 그 다음 것들도 신경쓰였다. 

 

우선 이번 여행의 최대 고비라 할 수 있는 

카리지니 국립공원 에코 리트리트의 왕복 6킬로 비포장 도로가 버티고 있었다.

 

카리지니 국립공원 인근에는 비포장 도로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오지에서 타이어가 터지는 일이 없으려면 국립공원 진입부터 시작해서 이동 경로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오늘은 싱가폴 에어라인 귀국편 비행기 좌석 지정창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제 돌아가는 길도 신경써야 한다는 사인처럼 느껴졌다. 

 

퍼스로 돌아가는 여정도 구성하고 숙소도 확보해야 했다. 

여러가지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어쨌든 원래 예정했던 빡빡한 일정은 느슨해졌다. 

 

그동안 고생하신 안쥔마님도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우선 카리지니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다시 짰다. 
이를 위해 톰 프라이스에 있는 캠핑장을 새로 예약했다. 

돌아오는 여정은 골든 아웃백의 내륙길을 통해 퍼스로 진입하는 방법을 고민했지만 적절한 캠핑장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올라온 길을 되짚어 가기로 했다. 
오면서 들리지 못한 코랄 베이의 유명한 해안가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적절한 캠핑장을 찾아 차례차례 예약했다.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안쥔마님과 저녁을 먹고 엑스머스 골프클럽 주변을 여유롭게 산책했다. 

 


클럽 하우스 앞에 재밌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안쥔마님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서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나도 한때 골프에 미쳤던 때가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을 낭비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도 엑스머스 시내 쪽은 시끌벅적했고 여지없이 서치라이트가 하늘을 긁어댔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란은 결국 잦아들었고
밤하늘에 어김없이 별들의 왕국이 떠올랐다. 

 

 

 

이제 카리지니에 더 검은 하늘을 만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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