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천문전승에 등장하는 물병자리의 원조는 굴라자리(the Great One)입니다.
이 단어는 '위대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별자리는 어떤 남성이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따금 이 형상의 상당 부분은 남자가 쥐고 있는 물병이며 여기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물줄기가 흘러나옵니다.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선 그의 모습은 산꼭대기보다 더 높은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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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물의 신 엔키(Enki) |
하늘 높이 들려 있는 물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굴라의 발 옆에 놓여 있는 물병은 지표로 흘러나와 강과 호수를 채우는 지하수를 상징합니다.
이 별자리는 계절적 성격을 띤 별자리로 겨울 동안 발생하는 폭우와 이로인해 상승하는 강물의 수위를 나타냅니다.
농경이라는 측면에서 굴라는 '관개 경작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즉, 관개농업을 통해 늦겨울, 보리밭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보리밭은 인근에 있는 또다른 별자리인 들판자리(the Field)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에는 '물'이라는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은 물고기들이 새겨지곤 합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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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우르 3왕조(BC 2112~2004)의 인장에 새겨진 엔키와 물염소(Goatfish) |
사실 이 물고기 중 한 마리는 바빌로니아 별지도에서 물고기자리(the Fish)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 별자리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쪽물고기자리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예술작품에서 강물이나 개울의 물줄기는 대개 구불구불 이어진 한쌍의 선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강줄기 양쪽에 형성된 둔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형상은 수메르 쐐기문자에서 '아(A)'로 표기됩니다.
(고대 바빌로니아 우주관, 그림 1 참고)
이 표기는 '물'을 의미하는 동시에 강이나 홍수, 바다와 호수와 같은 물의 속성을 가진 여러 단어에 복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형상은 황도12궁 기호에서 물병자리를 상징하는 지그재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물의 상징을 품고 있는 다른 별자리처럼, 굴라자리 역시 수메르에서 '엔키', 아카드에서 '에아(Ea)라고 불렸던 지혜의 신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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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고매 메소포타미아 경계석, 쿠두루에 새겨진 굴라 문양 |
그래서 어떤 점성술 기록에는 '굴라는 샘물의 신인 에아다'라는 기록도 등장합니다.
고대 예술에서 엔키는 물이 흘러 넘치는 물병을 손에 쥐고 있거나 왕좌 주위에 늘어놓고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따금 엔키는 완전히 차단된 사각형 안에 앉은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오늘날 심연(Abyss)의 어원이 된 압주에 좌정한 모습입니다. (그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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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 '압주'라 불리는 지성소에 좌정한 엔키의 모습 |
물병자리의 역사는 '벌거벗은 영웅'이라 불리는 라흐무(Lahmu)의 형상으로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라흐무가 예술작품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천년 기 초반이며, 주로 사자-황소와 격투를 벌이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고대 예술작품에서 라흐무는 대개 자비로운 형상으로 묘사됩니다.
일례를 들자면, 라흐무가 사자의 공격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기원전 2,500년 경부터 라흐무는 새로운 맥락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문설주에 새겨져 출입문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카드 시대(BC 2350~2000년 경)에만 한정된 역할이었습니다.
이후 라흐무는 물의 신과 연관성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때 처음 물을 품고 있는 신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2천년 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물이 흘러넘치는 물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정형화되었습니다.
또한 천상의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몇몇 별이 라흐무에게 할당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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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 물이 흘러넘치는 물병을 든 벌거벗은 영웅 라흐무 |
굴라자리는 '물 굴라(Mul Gu-la)'로 표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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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라는 이름은 수메르어로 '위대한', '거대한'을 의미하는 '갈(Gal)'에서 유래한 음절문자입니다. '위대한 이'라는 뜻은 '지도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최고 연장자'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제3의 뜻으로 '큰 컵' 또는 '큰 사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Gu)' 표기는 '실, 끈, 섬유'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그 형태는 '나누기', '분할'을 의미하는 기호를 아래로 거느린 컵의 형태로 그려집니다. '라(La)' 표기는 금속과 연관된 표기로 보이는데 '풍요로운', '울창한', '부유한'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비록 이 표기는 음절문자지만, 각 표기가 지닌 뜻은 물병으로부터 풍부하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라는 의미와 크게 동떨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한편 물병을 들고 있는 여신 그림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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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 물병을 들고 있는 여신 |
나중에 풍요의 별자리(the Star of Abundance)에서 다루겠지만, 물이 흘러넘치는 물병을 들고 있는 형상은 최고 등급의 신 아눈나키는 물론 하급 신인 이기기 신에게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신이나 여인으로 표현된 형상 역시 '위대한 이', 즉 '굴라'를 표상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림 6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신의 발아래 그림 2와 마찬가지로 물염소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떤 쿠두루에는 해당 여신을 직접적으로 '굴라'라고 표기한 것도 존재합니다.
물병을 들고 있는 인물을 여성으로 표시하는 것이 좀더 오래된 전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굴라'라는 이름이 원래는 여신에게 부여된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태양이 머무는 다른 황도대 별자리와 마찬가지로 굴라자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예언은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몇몇 주석을 통해 콩팥자리의 별(kidney-star)이 굴라자리의 별칭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엿볼 수는 있습니다.
콩팥자리의 예언은 농경과 홍수의 예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굴라자리의 상징적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죠.
에리두자리(the Star of Eridu)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특성은 두 별자리 모두 물이 흘러넘치는 물병을 든 인간 형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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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 천상의 물이 땅으로 흘러내리는 모습 |
물, 그리고 물이 흘러넘치는 물병이라는 상징을 품은 별자리와 엔키와의 연관성이 강화된 것은 기원전 2천년 기를 통해서입니다.
엔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신성을 가진 신입니다.
그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신이며, 대홍수가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예술과 문명을 일으킨 신으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은 신입니다.
엔키는 맑은 지하수가 모여있는 곳에 7인의 현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지구 깊숙한 곳에 위치하며, 그곳에서 여러 바다괴물과 인어 형상을 한 여러 신화적 존재가 엔키를 시중드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지하수의 주인으로서 엔키의 본성은 여러 신화에 등장합니다.
<엔키와 세계질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메르 서사시에는 '엔키가 하늘에 접근했을 때, 풍요의 비가 내렸다'라는 문구와 함께 '엔키가 땅에 접근했을 때, 강에 잉어가 가득 들어찼다'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이후에는 엔키의 업적과 특성이 계속 등장합니다.
엔키는 고원을 풍요로움 넘치는 푸른 초원으로 만들었고, 산악의 아이벡스 염소와 야생염소가 교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엔키의 물은 모든 피조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엔키가 새끼를 밴 소나 염소 앞을 지나가면 튼실한 새끼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엔키의 물은 경작지에도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경작지 가득 싹이 트고 어마어마한 곡식이 쌓이게 됩니다.
엔키의 거룩한 물은 인간의 번식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즉, 엔키가 임신한 여인들 앞에 나서면 훌륭한 자손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엔키의 특징은 그에게 부여된 호칭이 '아버지'라는 점을 통해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어로 아버지는 '아야(Aya)'라고 합니다.
그런데 <엔키와 세계질서> 시에 엔키를 수식하는 호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기는 물을 의미하는 표기 '아(A)'를 두 번 겹쳐쓴 '아아(AA)'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야(Aya)'의 어원이 무엇이었을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는 성적 상징이 노골적으로 등장합니다.
엔키가 뒷발로 일어선 사나운 황소처럼 일어섰다.
그는 성기를 들어올려 사정하였고
티그리스 강이 가득찼다.
살아 있는 씨가 강에 풀어져
달콤한 술이 되고
보리가 되었다.
위대한 황소로 상징되는 하늘은 모든 단물의 원천입니다.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만신전의 최고신 안(An, 수메르어, 아카드어로는 아누Anu로 표기함)이 하늘의 황소로 상징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누는 엔키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엔키에게 헌정되는 기도문에는 엔키가 하늘의 황소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거친 황소의 훌륭한 정액으로 잉태되었으며
아누의 첫 번째 아들로 탄생했다.
나는 위대한 대지에서 피어오른 위대한 폭풍이다.
참고 별자리 : 콩팥자리(the Kidney), 에리두자리(the Star of Eridu), 물고기자리(the 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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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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