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띄운 편지 - 1 -

2008. 1. 10. 23:25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 에세이

 

'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유행을 끌었던 요즘 이전에도

'해적'은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내는 전통적인 소재 중 하나였다.

캐러비안 해에 가면 실제로 '해적'을 모티브로 한 테마 파크도 있다고 하고,

사시사철 어린이를 동반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다.

 

인상에 남는 건 어린이들의 즐거운 모습과 함께 오버랩되는

'약탈과 살인과 강간을 일삼던 해적이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멘트였다.

 

뭐, 어쨌건.

 

인간의 유희들 중 상당 수가

과거 수십만년 동안 생존투쟁의 역사에서 누적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니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아마 나 정도 세대라면 '해적'에 대한 심상을 구성하고 있는 즐거운 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로

'말괄량이 삐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인공 삐삐의 아빠가 해적이었고,

그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증폭'까지 한 이 천하장사 꼬마 주인공의 유쾌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TV시청 목록 중 하나였다.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던 삐삐는 

빈 병속에 편지를 넣고 이것을 강물에 흘려보낸다.

 

이렇게 하면 아빠가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실제로 아빠가 이 편지를 받아보고 찾아오게 된다! ) 

 

삐삐의 그 스토리도 그렇고, 해적의 모티브를 담은 영화나 외화에서 자주 보이던,

무인도에 갇힌 주인공이나 인물이 빈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던지는 장면은

나름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이었던 것 같다. 

 

외로운 망망 대해 한복판, 그 누군가가 편지를 받아주길 바라는 그 심정이 오죽 절박했을까! 

 

과학문명이 찬연히 불타오르기 시작한 20세기.

인류가 형성시킨 새로운 집단 무의식 중에 아마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느꼈을 그런 종류의 절박함도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배가 우주라는 바다에 진수되기도 했고,

멀리 떨어진 섬들을 바라볼 수 있을만큼의 전망대를 세우는 기술도 갖췄지만,

그 아득한 어둠속을 바라보면 볼수록 인류는 처절하게 혼자라는 고독감만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긴 하다.) 

 

여기서 이야기의 모티브는 대단히 현대적인,

그러나 너무나 고전적이기도 한 '외계인'으로 이어진다.

 

80년대 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ET'는 말할 것도 없고,

TV 외화 시리즈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히트를 친 '브이(V)' 등,

나하나 꼽자면 수도 없을 이 모든 이야기들은 '외계인'을 그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외화 'V'에서 여주인공 줄리엣이 외계 사령관의 얼굴을 벗겨내던 장면에서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하고 있다.

 

'외계인'의 모티브는 그 자체가 모험, 꿈,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두려움과 같은 감성적 측면뿐 아니라, 탐구, 과학, 행성, 우주와 같은 이성적 측면에도 어필하는 대단히 폭넓은 모티브이기도 하다.

 

하나의 모티브가 담아내는 폭이 넓다는 것은

그 모티브 자체가 모호하기 이를데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의 교리가 비합리적일수록 신앙이 강해지는 것과 같다.

원래 이야기란 그런 것이고 그만큼 '외계인'의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감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해적'의 모티브가 그렇듯, '외계인'의 모티브 역시 그 실체에 있어서는 충분히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라면 '에이리언'과 같은 수많은 영화가 우리를 단련시켜 주고 있으니 오히려 만반의 준비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이 외계인 이야기는 그 강력한 파워로 인해 실험과 검증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까지 파고들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부정적이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적 사실들이 지구밖 생명체의 근거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확률적으로 그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가져다 준 새로운 도구들이 오늘날 외계인의 탐색에 수없이 동원되고 있다.

나름 합리적임을 자부하는 과학자라 하더라도

이 우주가 돌덩이와 가스덩이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행성이 전부라면,

그저 언젠가 바닥날 지구를 대신할 대체제에 지나지 않는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본다면,

그 열정과 흥미가 곧 사그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외에 누군가를 찾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게 단순한 호기심이든, 흥미든, 아니면 인류가 이렇게 외로울 수만은 없는 존재라고 외치는 범우주적 사고를 지닌 철학자든, 아니면 새로운 인류를 찾아 자기한테 복종하는 사람의 머릿수를 채우고 싶어하는 기업총수나 정복자 같은 사람이든, 이 지구가 신이 만들어낸 천국과 지옥의 검문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골수 종교인이 아닌 한, 우리는 우리와 같은, 그러나 지금은 그 형태조차 알 수 없는 형제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칼 세이건의 서사적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코스모스를 동경하는 것이고

같은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는 한,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들 존재들과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무인도에 갇힌 인류가 편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이미 1972년과 1973년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 각각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편지가 실려 우주에 진수되었다.

1974년에는 아레시보 전파를 통해  '우리에 대한 뉴스'를 보냈고,

보다 정교한 레코드가 제작되어 1977년 보이저 우주선과 함께 우주로 보내졌다.   

 

인류가 최초로 우리보다 고등한 존재를 예상하고 시도한 일련의 교신기호들을 보면, 다시금 우리 스스로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다만, 일련의 편지가 가지는 의미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자 하는 의도만을 가진 것이 아님은 물론일 것이다.

 

 

다음 이야기 : 파이오니어 플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