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무릎 - 2018 쌍둥이자리 별비 알현기

2018. 12. 17. 20:23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별비를 제대로 즐기려면 무조건 어두운 밤하늘을 찾아가야 합니다. 

 

작년 쌍둥이자리 별비는 황매산에서 맞았었습니다. 

올해 제가 선택한 곳은 지리산 뱀사골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와운마을입니다. 

천년 세월을 굳건히 서서 뱀사골 골짜기를 지키고 계시는 할아버지 소나무와 할머니 소나무가 계시는 곳이죠. 

 

저처럼 DSLR을 이용한 광시야 촬영을 즐기는 분들은 

대개 아름다운 하늘은 물론 아름다운 땅의 풍광도 함께 담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합니다. 

와운마을은 그러한 목적에 딱 들어맞는 곳이고 별비가 내리는 날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늘과 아름다운 땅의 모습이 어우러지는 날이죠. 

 

그래서 지난 한여름 페르세우스 별비 때도 이곳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시는 할머니소나무와 함께 쏟아져내리는 별비 풍광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1> 지난 여름, 할머니 소나무와 함께 3박 동안 담아낸 페르세우스 별비의 별똥별 중 잘 생긴 궤적만 골라내서 합성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영광스럽게도 2019년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천문력 8월 사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곳 와운마을에는 할머니 소나무 외에 할아버지 소나무도 자리를 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소나무와 함께 할아버지 소나무도 멋지게 담아드리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왠지 앵글에 쉬 담겨지지 않았습니다. 

 

 

 

사진 2> 지난 8월 페르세우스별비 때 담은 할아버지 소나무의 모습

할아버지 소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흘러나오는 미리내를 연출할 목적으로 잡은 앵글입니다만, 느낌이 전혀 살지 않는 엉성한 사진이 되었습니다. 

        

 

 

 

사진 3> 10월 9일, 용자리 별비 때 담은 할아버지 소나무의 모습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든든함을 나타내고 싶어서 잡은 앵글입니다. 

하지만 하늘도 좁게 나오고 할아버지 소나무의 모습 역시 생각만큼 든든하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번 쌍둥이자리 별비 여행은 할아버지 소나무의 모습을 담기 위한 세 번째 시도였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할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12월 14일 오후 4시. 

서둘러 길을 나선 탓에 어두워지기까지 대략 1시간 30분을 남겨놓은 시간에 할아버지 소나무 아래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앵글 저런 앵글을 시도하기 시작했죠. 

 

이래저래 화각을 잡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열두 남매 중에 막내셨고, 어머니는 다섯 남매 중 넷째시죠. 

저는 그런 부모님의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부모님이나 저 모두 한참 아래 터울이다보니 

제가 태어났을 때,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이미 작고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장수하신 친할머니 덕에 할머니라는 존재는 경험과 기억으로 남게 되었죠. 

하지만 '할아버지'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그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게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거대한 대청마루에서 정자관을 눌러쓰고 자식이나 하인에게 불호령을 놓는 

그런 전설의 고향류의 이미지가 전부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소나무의 모습을 그저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만 담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만약 할아버지가 내 옆에 계시다면 아주 어린시절로 돌아간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어떻게 별똥별을 보려 했을까?

그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든든한 기둥이기도 하지만 한없이 자상한 할아버지이기도 했죠. 

 

그래서 할아버지 소나무의 무릎을 베고 눕기로 했습니다. 

굵직굵직한 뿌리가 땅으로 잠겨들어가는 할아버지 소나무 둥치 아래 눕자 

제가 그토록 담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하늘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죠. 

 

그렇게 그곳에서 쌍둥이자리 별비를 맞았습니다. 

 

 

 

 

 

 

 

 

 

 

 

 

 

 

 

 

사진들 4 ~ 10> 할아버지 소나무와 쌍둥이자리 별비의 다양한 모습들. 

황소자리를 지나는 46P/비르타넨 혜성이 멋진 조연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진 11>와운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민박집 옥상에 차려놓은 베이스 캠프

혹한과 폭설이 몰아치는 한 겨울 와운마을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날은 이곳 민박집 사장님도 영업을 하지 않으시는 날이었고, 더더군다나 집을 비우시는 날이시기도 했죠. 

하지만 고맙게도 전화를 드렸을 때 옥상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셨고, 그 덕에 작은 망원경을 설치한 베이스 캠프도 차리고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는 따뜻한 커피를 끓여가며 밤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별똥별들이 달빛을 이기고 초저녁부터 쏟아져 내렸습니다. 

지리산 능선 너머로 새벽을 이끌고 올라오는 금성이 나타날 때까지 밤새 맘 속에 소중히 간직해간 소원을 반복해서 빌었습니다.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죠. 

 

그러고보니, 쌍둥이자리 별비는 작년에도 소원이 모자랄 만큼 많은 별똥별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https://big-crunch.tistory.com/12349345 )

 

아마도 쌍둥이자리 별비는 밤이 강요하는 공포와 혹한의 추위를 넘어 오롯이 기나긴 밤을 견뎌내며 그 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별지기들에게 영겁의 시공간이 선사해주는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별지기가 된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사진 12> 할아버지 소나무와 함께 밤새 담아낸 1400여장의 사진 중에서 잘 생긴 별똥별 궤적을 모아 합성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2018년 제 가슴에 담긴 쌍둥이자리 별비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