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2. 20:14ㆍ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사진1> 칠레 아타카마 사막.
저 멀리 산 위에 보이는 것이 ESO 라실라 천문대입니다.
제게는 꿈같은 순간, 꿈이 이뤄지는 것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습니다.
1999년, 대학에서 칠레 아옌데 정권의 등장과 몰락을 배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많이 비슷한 칠레의 역사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칠레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별을 보게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남반구의 하늘을 보러 호주를 향할 때도 저는 구태여 칠레를 꼭 가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던 와중에 유럽남부천문대(European Southern Observatory, 이하 ESO)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2013년 8월 14일부터는 ESO에서 발표하는 천문뉴스를 번역하여 제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ESO의 천문대들은 우주공간에 자리잡은 허블우주망원경과 달리 제가 발딛고 선 이 지구상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시설이다보니 이곳에서 발표되는 천문뉴스와 사진들이 제겐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ESO의 라실라 천문대, 파라날 천문대, 그리고 차이난토르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는 APEX, ALMA등에서 발표되는 뉴스와 사진들을 접하면서 아마추어 천문인으로서의 지식과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던 제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여느 때처럼 ESO의 뉴스를 펼쳐보다가 2019년 7월의 개기일식이 라실라 천문대를 지나가고 라실라 천문대는 이를 기념하여 천문대 방문 티켓 300매를 한정으로 판매한다는 뉴스를 보게 된 것입니다.
https://www.eso.org/public/news/eso1822/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티켓 판매가 예고되었던 2018년 7월 13일 금요일 20시(한국시간 기준) 순식간에 티켓이 동나버린 상황이었지만 용케 두 장의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9년 6월 28일.
저는 마침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발을 디뎠습니다.
공항에서 미리 예약한 렌트카를 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칠레의 한적한 시골마을 이슬라네그라였습니다.
사진 2> 칠레에서의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한 완소 렌트카.
원래 칠레 일식 알현의 컨셉 중 하나가 철저한 국뽕이었습니다.
그래서 렌트카 역시 국내 브랜드의 차량을 신청했습니다만 이미 예약이 차버렸다며 푸조를 할당 받았습니다.
마음이 약간 상하긴 했지만 이 차와 함께 기나긴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3> 이슬라네그라.
살바도르 아옌데와 함께 칠레 민주화의 상징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곳입니다.
이슬라네그라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늘 꿈 꾸어왔던 여정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진 4> 이슬라네그라를 방문한 칠레의 어린 학생들.
칠레의 학생들은 네루다의 작품과 생애를 통해 그 당시 칠레가 어떤 사건을 겪어야 했는지를 배울 것입니다.
이 와중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소중함을 익히게 되겠죠.
사진 5> 이슬라네그라가 품고 있는 장대한 남태평양 바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등장하는 장면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 마리오가 프랑스 대사로 부임한 후 향수병을 앓고 있는 네루다를 위해 이슬라네그라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부분입니다.
비록 픽션이지만 마리오가 소중하게 담았을 칠레의 대자연의 소리를 느끼기 위해 눈을 감고 그곳의 공기를 마음껏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진 6> 구리에 갇힌 콘도르 그라피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이자 칠레의 유명한 해안도시 발파라이소에서 만난 칠레의 청년 알바로(Alvaro)는
현재 칠레의 상황을 '구리에 갇힌 콘도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대사를 거쳤고 비슷한 경제발전 양상을 겪었지만 어느 순간 칠레의 경제상황은 정체되었습니다.
알바로는 이를 강력한 전통 산업(구리 산업)으로 인해 청년의 꿈(콘도르)이 발현되지 못하고 새로운 산업이 잉태되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슬라네그라와 발파라이소를 거쳐 드디어 제가 칠레에 온 목적, 그러니까 'ESO 라실라천문대'에서 '개기일식'을 맞으리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타카마에 자리잡은 칠레 제2의 도시 라세르나로 향했습니다.
차가 아타카마 주의 경계를 넘어설 때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곳에 오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치밀하거나 계획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죠.
그렇게 아둔하다보니 1년 전, 라실라 방문티켓을 확보하고도 그것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준비를 미리미리 하지 못했었습니다.
ESO 방문 티켓을 확보하고 5개월이 흘러버린 2019년 1월에 ESO에서 메일 한 통이 덜컥 왔죠.
라실라 천문대에서의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여권정보를 포함한 개인 정보를 제출하라는 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7월 2일 10시까지 라실라천문대의 입구인 캠프 펠리카노(Camp Pelicano)에 도착하라는 안내가 그날 교통이 무지 막힐거라는 예고와 함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티켓을 확보했을 때의 기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안절부절해지기 시작했죠.
캠프 펠리카노라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대학에서 배운 칠레는 그저 하나의 이론이었을 뿐, 실체로서의 칠레에 대해서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편 제 회사 업무는 월말과 월초에 바쁜 일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7월 2일에 칠레에 있으려면 아무리 개념이 없다 하더라도 월말 월초에 대한민국에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칠레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죠.
ESO에서 오는 메일에는 매번마다 "오기 어려우면 주저 말고 말씀해 주세요! 환불해 드립니다."라는 멘트가 아주 친절하게 적혀 있었죠.
그러다보니 마음 한 켠에서는 걍 가지 말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칠레 여정이 구체화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칠레에 관해 제가 꿈꾸어왔던 막연한 기대를 포기한 다음부터였습니다.
우선 칠레의 밤하늘을 만끽하자는 생각을 포기했죠.
이스터 섬에 가서 모아이 석상을 보겠다는 생각도 포기했습니다.
오로지 ESO 라실라천문대에 가서 개기일식을 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목표를 한정하고 보니 일정이 구체화될 수 있었습니다.
칠레에서 움직이는 내내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하늘이 열려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7월 2일 그 시간에 나는 반드시 ESO 라실라 천문대에서 하늘을 보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내가 칠레에 온 유일한 이유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7월 1일은 라실라천문대 사전 답사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라실라천문대로 가는 길목에는 아타카마 주정부에서 개최한 일식행사장 설치가 한창이었습니다.
사진 7> 아타카마 주정부의 일식행사장.
당시 칠레는 온통 일식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사진 8> 한켠에 텐트를 치고 있는 사람들.
당일 이곳 주변에 어마어마한 교통 정체가 예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타카마 곳곳에는 일식 행사를 위해 미리 자리를 선점하고 야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식행사장을 지나 한참을 더 들어가자 드디어 ESO의 안내메일에 적혀 있었던 캠프 펠리카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9> ESO 라실라 천문대 입구인 캠프 펠리카노.
이곳에 왔다는 안도가 있었지만 내일 일식 행사때 문제 없이 이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캠프 펠리카노의 경비원에게 내일(7월 2일)일식 행사를 위한 출입자 명단 확인을 요청했지만 경비원은 영어를 할 수 없었고 저는 스페인어를 할 수 없어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얘기로는 명단에 제 이름이 없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이곳 멀리 칠레까지 와서 행정상의 실수로 라실라천문대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디가나 문제가 되는 오버부킹에 대한 걱정도 떠올랐죠.
외국에서 오버부킹의 희생자는 대개 아시아인들입니다.
ESO같은 시설에서 그와 같은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악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더욱 쉽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닫혀진 철책 문에 매달려 악착같이 재확인을 요청하고 ESO에 재차 확인을 요청하는 메일도 보냈습니다.
사진 10> 말이 통하든말든 경비원에게 따지고 따지고 따지는 중.
그러던 중에 뭔가 포스를 풍기는 중후한 노부인께서 오셔서 또박또박한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경비원은 내일 행사 명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가 확인한 명단은 잘못된 것이고, 내일 출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니 아무걱정 하지 마세요.(Don't Worry)라고 말입니다.
그 노부인께서 말씀하신 'Don't Worry'가 마치 구세주께서 말씀하시는 Don't Worry처럼 들렸습니다.
그렇게 확답을 받고 나서야 캠프 펠리카노를 나와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진 11> 7월 2일 일식 알현 준비.
드디어 7월 2일, 그날이 밝았습니다.
가방에 태극기를 걸고,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잠바를 걸치고 7월 2일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사진 12> 7월 2일 이른 새벽, 안개가 자욱한 칠레의 시골마을 발레나르를 출발하는 순간.
사진 13> 라실라천문대 입구인 캠프 펠리카노의 입구,
상당히 이른 시간에 출발했음에도 라실라천문대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제 뒤로도 차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사진 14> 드디어 라실라천문대 경비 게이트를 통과하여 입장하는 순간.
동영상 1> 캠프 펠리카노에서 라실라천문대까지는 셔틀버스를 타고 45분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저 멀리 차장 밖으로 라실라천문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진 15> 라실라천문대 입성.
오른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NTT망원경부터 왼쪽으로 ESO 1미터 슈미트망원경, 덴마크 0.5미터 망원경, 첨단행성탐사장비인 TRAPPIST 망원경 등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곳에 늘 오고 싶었고, 그것은 제겐 꿈이었죠.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진 16> 라실라천문대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3.6미터 망원경의 돔입니다.
사진 17> 라실라천문대의 한켠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뒤에 보이는 것은 지금은 사용되고 있진 않지만 수많은 천체사진작가님들의 작품의 배경이 된 직경 15미터의 스웨덴-ESO 서브밀리미터 망원경입니다.
하늘은 하루종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던 시간들이 제겐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그 소중한 시간들이 한땀한땀 흘러 드디어 일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진 18> 라실라천문대의 하늘에 펼쳐진 달그림자.
지금까지 제 모든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 19> 일식이 지나고 다시 밝은 낮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저녁 노을이 시작되었죠.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접고, 그 어마어마했던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사진 20> 지금까지 이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노을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를 세분화, 구체화하고 그걸 하나하나 밟아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을 만들어낸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꿈은 그저 꿈일때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계속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무리하여 업무를 빼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냥 '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 '꿈'을 현실로 바꿔버린 순간의 희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길을 걷다가 문득, 자리에 누우면 문득, 그 때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아마 그 때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서있었다는 것 때문에 제 삶은 그 이전과 그 이후가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머나먼 지구 반대편까지의 여정, 그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 주신 제 옆지기께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동영상 2> 라실라천문대에서 맞은 일식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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