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8. 13:26ㆍ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1. NGC 4631을 만나보세요.
북두칠성의 꼬리 아래 사냥개자리가 있습니다.
사냥개자리는 무려 네 개의 메시에 은하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충돌하는 두 개 은하를 볼 수 있는 M51은 너무나 유명하죠.
워낙 멋진 천체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긴 하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쉬운 은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NGC 4631입니다.
NGC 4631은 고래은하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씬한 옆모습에 한쪽으로 치우친 은하중심 때문에 혹등고래를 옆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죠.
'밤하늘을 유영하는 우주고래!'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솜브레로 은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뾰족한 느낌이 있고 M82 시거은하와도 충분히 견줄 만한 독특한 은하입니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한 겨울 밤에는 자정이 지나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면 떠오르는 시간도 빨라지기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편하게 만나볼 수 있는 은하입니다.
NGC 4631을 한 번 만나보세요!
생각보다 훨씬 밝고 큰 모습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 은하를 깊게, 좀더 오래동안 바라보신다면
마치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위성은하 NGC 4627도 보실 수 있습니다.
2.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비루한 별지기의 소설책 광고입니다.
글이 불편하신 분은 그냥 스킵 부탁드립니다.
3. 그날 바다.
2014년 4월 16일.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 날의 트라우마가 있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날은
세월호가 침몰한 날입니다.
'다행'이라는 말이 정말 죄송하지만,
저와 제 주변에는 다행히도 세월호 희생자 또는 이와 연관된 분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직도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프로젝트로 분주했던 사무실에서
출근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놓은 듯 생생하게 기억하죠.
그로부터 열흘 후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서울지부 3급 연수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별지기 단체라는 곳에 처음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같은 식탁에 앉은 분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말마다 우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어쨌든 이렇게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니 그나마 살 것 같네요."
라고 말입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땅의 기성세대로서 숨쉬고 살아있는 것조차 죄스러웠죠.
4.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를 만들면 어떨까?
2016년 12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에 갔다온 후 그 내용을 제 페북에 올렸는데
지인 한 분이 댓글에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는 별자리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별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에 이 안타까운 사건을 새겨 놓는다면
금새 잊혀지고 마는 일이 아닌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 사회가 보다 안전한 사회가 되는데
기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5. 전쟁.
당시 저는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에서 작은 직책을 하나 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운영하는 밴드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 '세월호 아이를 기억하는 천체'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죠.
그리고 사달이 났습니다.
제 글 아래에서 댓글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를 빨갱이로 몰았고
또 누군가가 그 분을 비난하면서 비난의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저는 제 게시글을 삭제했습니다.
제 게시글 아래 달려 있던 전쟁도 함께 사라졌죠.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힘들여 쓴 댓글이 사라졌다는 불만으로 시작되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밴드에서 걷어냈습니다.
대신 페이스북에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선정'이라는 오픈 그룹을 만들었죠.
하지만 또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홍보 문제였죠.
'이런게 있으니 호응하시는 분은 참여해 주세요'라는 최소한의 홍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천문지도사 밴드에 다시 글을 적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를 만드는데 호응하시는 분은
페이스북에 공간을 만들었으니 와서 참여해 주세요'
라는 취지의 글을 페이스북 주소 링크와 함께 달았습니다.
그 글에 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공감과 응원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많았고
어떤 분은 제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쪽지도 보내주셨지만...
그렇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숨이나 쉬고 사는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 저는 상처받고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죠.
그 영향이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천체를 여러 형태로 풀어 이야기하는데 특기있는 분들이 모이신 야간비행 홈페이지에는
그나마 손을 벌벌 떨면서도 홍보문을 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네이버카페 '별하늘지기'에는 홍보문을 차마 올리지 못했습니다.
익명성이 강한 별하늘지기에서 댓글전쟁이 벌어진다면
아마추어천문학회 밴드에서 벌어진 댓글전쟁은 그나마 애교일 거라는 생각에 미리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제가 선택한 방법은 아주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카페 회원분들께 쪽지를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분들께 일일이 쪽지를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없으면 끈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당시 저는 용기도, 끈기도 없었습니다.
시간을 내어 한 분 한 분께 쪽지를 보내긴 했지만
결국 쪽지를 발송한 목록은 218분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6. 용기를 달라고 빌었습니다.
2017년 1월. 설연휴를 빌려 동거차도에 다녀왔습니다.
설연휴라서 상하이 셀비지 인양선은 철수한 상태였고
동거차도 세월호 인양 감시탑에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했습니다.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7.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 선정.
페이스북 오픈그룹에는 대략 70여 분이 모였습니다.
그 분들을 상대로 제안과 투표가 진행됐죠.
제안된 천체는
NGC 4631, 플레이아데스(M45), 공기펌프자리, 프레세페(M44), 봄철의 대삼각형, 사자자리
이상 여섯 개 천체였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기능을 이용한 투표가 진행되었고
2017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3주기에 맞춰 대상을 선정했습니다.
바로 NGC 4631이 선정되었죠.
NGC 4631을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로 제안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온라인에 '석가'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시는 분이 그린
그림에서 NGC 4631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마 NGC 4631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것은
이러한 저의 느낌에 함께 공감해 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8. 분향소에 바친 NGC 4631
감사드릴 일이 참 많았습니다.
우선 이현수 선생님(째즈빈)께서는 저희가 사용할 NGC 4631 사진을 촬영해 주셨죠.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에서는 2018년 천문력 4월 사진에 이현수 선생님의 사진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해 4월 16일.
저는 이 달력을 들고 다시 동거차도로 향했습니다.
이때는 세월호가 인양된 지 이미 1년도 더 지난 때였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세월호 인양 감시탑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다음날 진도로 돌아와 팽목항 분향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분향소 제단 위에 NGC 4631의 모습이 담긴 천문력을 올렸습니다.
모쪼록 이 가슴아픈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별지기들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9. 그런데? 그래서?
어찌어찌 모든 과정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허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NGC 4631이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로 선정됐지만 이걸 어떻게 세상에 알려야 할까요?
그냥 뜻이 맞는 몇몇 분들이 모여 '이렇게 하기로 했다.'라는 것으로 충분한 걸까요?
저는 이때 제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를 선정하겠다고 달려오긴 했지만
이 내용을 세상을 향해 외칠 아무런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 NGC 4631은
그저 한 번 발생했다 사라지는 이 세계의 수많은 이벤트 중 하나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10. 알려야겠다.
2019년 7월 4일.
저는 칠레 라실라 천문대에서 제 인생 첫 번째 개기일식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이제 종노릇은 그만하고 주인으로 살겠다고 말입니다.
19년 동안 몸담은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제 별지기 인생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별아띠 천문대가 있는 경남 산청 간디마을에서 그해 겨울을 보냈습니다.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별보러 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줄기차게 관측을 나가곤 했죠.
하지만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심지어 경남 산청이라는 시골에 있으면서도 별보러 나가는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그동안 제게 월급을 떨어뜨려주던 벨류 체인은 저 스스로 끊어 버렸습니다.
문제는 누군가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저에게 던져주게 만들 재능이 저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절벽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었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저녁에 잠이 들때까지
번역과 글쓰기에 몰두했습니다.
어쨌든 자리에 앉아 글을 써야만, 그래야만 무거운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중압감 때문인지
용케 글그물이 한코한코 엮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잊고 있었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NGC 4631이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라는 사실을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NGC 4631을 여러 소재 중 하나로 삼은 글을 썼고
그 글이 운좋게도 2021년 제 9 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 당선되었습니다.
11. 기억해 주세요.
소설의 제목은 '실버 파라다이스'입니다.
인구절벽의 위기에 맞닥뜨린 2038년의 대한민국에서
노인들이 맞닥뜨리게 될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며 쓴 책입니다.
교보문고에서 eBook에 오늘(2023년 1월 18일) 오픈되었습니다.
교보문고 오리지널 작품으로 온라인 교보문고 eBook Tab에서만 보실 수 있습니다.
비록 디바이스에 교보문고 eBook 리더기를 설치해야 하는 단점은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배송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바로 보실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글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월호는 NGC 4631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한 장에서만 다뤄질 뿐입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 사회에 대한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그 일례로 다뤄지죠.
안타깝게도 세월호 사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침몰 원인조차도 밝히지 못했죠.
달라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세월호'가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이 또 벌어져도 우리는 막지 못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고도 배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신 별지기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NGC 4631을 한 번 찾아봐 주세요.
그리고 기억해 주세요.
NGC 4631은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천체입니다.
기억해 주신다면
세월호에 덧씌워진 강고한 진영 프레임도 깨질 것이고
진실도 밝혀질 것이고
다시는 우리 아이들을 허망하게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락방별지기 이강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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