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일식 여행 23 - 여행의 마침표

2023. 10. 5. 14:461. 별과 하늘의 이야기/2023 서호주 일식 여행기

1. 싱가폴 단상

   2023년 4월 29일 이른 아침 퍼스 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29일과 30일, 1박 2일 동안 싱가폴 구경을 했다. 
   

세계 최대 물동량을 자랑하는 싱가폴 해협의 모습

 

   싱가폴 거리를 걸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

 

   왜 싱가폴 거리는 편하게 느껴졌던 걸까?
   호주에서는 불편했던 걸까?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를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린 답은 익명성이었다. 
   
   덩치나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배경으로 숨어들 수 있다는 것.
   그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 준 것 같았다. 

 

배경으로 숨어들 수 있다는 것이 비슷비슷한 사람이 있는 여행지가 편안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벌써 25년 전 이야기지만 싱가폴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대학생 때였다. 
   어떤 수업에서 조별 토론을 하는데

   조원 하나가 최근에 싱가폴을 다녀왔다면서 
   싱가폴의 공공질서와 깨끗한 거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 말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거리가 깨끗한게 정상입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쓰레기 버릴 수도 있죠.
    질서가 갖춰진 사회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위협하는 사회가 아니라 
    쓰레기가 버려지더라도 그게 다시 깨끗하게 치워지는 사회 아닐까요?"
   
   이런 가시돋힌 반론을 제기한 이유는

   내게 싱가폴은 김대중과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으로 프레임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민주주의의 형식은 서구사회가 발전시켰는지 몰라도,
   민주주의의 내용은 아시아 전통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는 논지를 펴
   아시아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리콴유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싱가폴은 독재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리콴유의 주장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독재국가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듯이 말이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다. 

   싱가폴은 여전히 잘 나가는 도시국가이지만 

   결국 후진 정치가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

   바로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몰락에 대한 것이다.


   싱가폴 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맥스웰 푸드 센터(Maxwell Food Center)에 가서 식사를 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다 보니 어느새 식탁이 가득 찼다. 
   
   가격도 저렴했다. 
   
   서호주를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싱가폴 식탁에 앉고보니 호주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사진 생각이 퍼뜩 들어 찍었다.

 

   나는 서호주의 비싼 물가에 불만이 없다.
   평균 3만원에 육박하는 식사에도 아무 불만이 없다.
   인건비는 가장 비싸게 다뤄져야 하고 인간의 노동이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다. 

   다만 호주가 그 비싼 대가에 걸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인지는 의문이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한 김대중 대통령 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형식의 완벽함은 내용의 퇴보를 촉발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값비싼 인건비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정작 음식이나 서비스처럼 구성되어야 하는 내용이 형편없는 것처럼 말이다. 
   
   형식이 완성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 관성이 되자
   형식만 갖추면 내용은 어찌되든 아무 상관없는 세상이 되어가는건 아닐까?
   
   형식이라는 창고 안에 쌓여있던 내용은 썩어 없어지는데 
   그저 열심히 창고 벽에 회칠만 하고 있는건 아닐까?
   
   아마 그것이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갖춘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오늘날의 세계가 
   보수와 극단으로 회귀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싱가폴에서는 형식도 적절하고 내용도 풍부한 맛난 식사를 실컷 할 수 있었다. 

   
      
2. 여행의 마침표.

   5월 1일 아침,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참 좋았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고
   서서 꺼낼 물건과 앉아서 꺼낼 물건과 누워서 꺼낼 물건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 곳. 

   집이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삶이 누적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날 저녁 처이모님 댁에 맡겨두었던 막내 강아지 하니도 데려왔다.
   나와 안쥔마님과 막내 강아지 하니.
   가족이 회복되었으니 이제 이 여행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여행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서호주로 떠나기 전에 안쥔마님께서는 모든 순간을 동영상으로 남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었다.
   2019년 칠레 여행이 너무나 좋았던 안쥔마님은
   그때 사진이나 동영상을 충분히 남기지 못했던 것을 내내 아쉬워했고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많은 영상을 남기겠다고 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그런 기록을 남기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록을 남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남긴 기록을 정리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행 유튜버들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어쨌든 안쥔마님께서는 결심한대로 서호주 현지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영상으로 남겼다. 
   그 흔한 짐벌 하나 없이 오직 셀카봉과 본인의 핸드폰으로 말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이제서야 
   내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다 안쥔마님께서 쏟으신 노고 덕분이다. 
   
   그 덕분에 2019년 칠레 일식 여행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진과 디테일한 내용이 담긴 여행기를 쓸 수 있었다. 

 

   여행에 함께 동행해 주시고  소중한 기록을 남겨주신 안쥔마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23년 10월 5일. 
   이제서야 이렇게 서호주 일식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서호주를 누비던 그때가 행복했고

   그때를 추억하는 지금도 또 한 번 행복했다.

   이제 이 기록을 들춰볼때마다 내내 행복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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