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끄저기(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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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모님들께.
1. 나는 고모님들보다 이모님들과 훨씬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자랐다. 그런데 이게 나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어떤 진화론 책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이모와 조카는 혈연적 연결관계가 확실히 보장되지만 고모와 조카는 확실하지 않다! ㅋㅋㅋ 그럴듯한 설명이네. 하지만 생식본능이 나의 유전자를 후손을 통해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과학의 탈을 쓴 주문"일 뿐이라고 평가하는 나에게는 이모와 고모의 진화론적 분석 역시 허황되게 들렸다. 2.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모보다 이모와 친한 데에는 확실하고 단순한 이유가 있는데 고모님들은 항상 잔소리를 주셨지만 이모님들은 항상 용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친가에 가야 하는 명절 당일이 아니..
2023.08.14 -
얼마나 사무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 - 아버지의 해방일지
"괜히 데모해서 형이나 가족들 힘들게 하지 말아라." 내가 대학에 갈 때 어머니께 들은 얘기 중 하나다. 다행히 나는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의 단일화 실패로 정권을 노태우에게 넘겨줬을 때부터 더 이상 "독재정권 물러가라" 따위를 부르짖을 명분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내가 대학을 갔던 때는 김영삼 정권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내게 데모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털어봐야 벼룩도 안 나오는 전형적인 소시민 집안이었던 우리 집에서도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연좌제란 사람의 영혼을 옭아매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에어컨이 고장난 덕에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이른 새벽까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낭만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근래 읽는 책들이 하나하나 너무 좋다. 이 책 는 빨치산을..
2023.07.31 -
한여름의 추억
에어컨이 고장났다. AS센터에 연락하니 한여름 에어컨 고장 신고 폭주로 순서를 기다려 다음주 월요일 오전 9시에 방문 할 거라 한다.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내 전문분야다. 혼쾌히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 덕에 밤에도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고 잠이 든다. 이른 새벽까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귀뚜라미 소리가 잦아들고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부터 매미 소리가 지천에 피어난다. 그러고보니 옛날 산청 채울집에 있을 때 생각이 났다. 난 시골은 도시와 달리 여름에도 시원할 거라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다. 산청이 서울보다 한참 남쪽이어서 그랬겠지만 여름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한여름 대낮에는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함께 지내던 하늘이 하나가 더위에는 아랑곳 없이 내 품에 폭 파묻혀 한 낮의 열기를 견뎌냈다..
2023.07.29 -
욕망을 풀어내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4년 전, 칠레 일식여행을 준비하다가 읽었던 책 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역시 좋은 책답게 두 번째 읽으니 또다른 생각할 거리를 내준다. 이 책이 이번에 내게 던진 화두는 '욕망'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욕망은 잘못되고 악한 것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나이를 먹은 지금 아직도 나에게 솔직해 지지 못하고 이런 저런 가식과 치장을 두르고 사는 삶이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리오의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가 살아온데로 살아가는 반면 마리오는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대개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 역시..
2023.07.29 -
악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착짱죽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착한 짱개는 죽은 짱개'의 줄임말이다. '짱개'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니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 뿐...그러니까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중국인은 죄다 나쁜 중국인'이라는 섬뜩한 뜻을 가진 말이다. 어떻게 이런 말이 온라인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수 있을까?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혐오의 근저에 흐르는 선동과 왜곡은 20세기 초, 유럽에 만연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와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물론 21세기 중국인과 20세기 유대인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혐오의 대상인 중국인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그때도 이방인 집단을 혐오하고 지금도 이방인 집단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평소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
2023.07.24 -
삶의 정수 - 윤정모 단편소설집 '밤길'
글을 쓰다보면 멋진 글이 나올 수도 있고 식상한 글이 나올 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글을 쓴다는 거니까. 고등학생 때 성당친구의 권유로 ‘고삐’라는 소설을 통해 윤정모를 만났다. 그때 그 소설을 읽고 마음이 무척 아팠던 기억이 있다. 워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표지에 이런 글이 있었던 거 같다. “남자는 왜 배설하고 돈을 주고 여자는 왜 몸을 파는 역할을 하는가” 표지의 글이 도발적이었던 만큼 내용 역시 도발적이었다. 내가 당시 이 소설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단순히 책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영등포역 길건너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는 몸을 파는 누나들이 지나가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잡아 채는 풍경이 일상적이었고 이..
2023.07.22